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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
골품제는 신라 사회의 신분 제도입니다. 혈통에 따라 신분에 일부 제한을 두었던 폐쇄적인 신분 제도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약 1000여 년간 신라 사회의 기본 성향의 패러다임이었으며, 이웃인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골품제의 구성
골품제는 크게 성골과 진골로 나뉘며, 성골은 왕족을, 진골은 일반 귀족을 의미했습니다. 성골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졌으며, 진골은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닌 다른 귀족들을 의미했습니다. 성골과 진골은 서로 결혼할 수 없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 성골: 신라의 왕족으로, 박혁거세의 직계 후손.
- 진골: 일반 귀족으로,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닌 귀족.
- 6두품: 중간 계층의 귀족.
- 5두품: 하위 계층의 귀족.
- 4두품: 최하위 계층의 귀족.
- 평민: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으로, 토지 소유권이 없고 정치 참여나 사회 활동에 제한이 있음.
골품제의 주요 특징
- 혈통 중심: 골품은 혈통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 계층적 질서: 성골, 진골, 4두품, 평민 등의 계층으로 나뉘었습니다.
- 차별: 각 계층은 서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 변화: 신라 후기에는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 폐지: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골품제의 영향
- 신라 사회의 계층적 질서 유지: 골품제는 신라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신라 문화 발전: 성골과 진골은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무덤을 만들거나, 아름다운 예술품을 제작했습니다.
-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 골품제는 이웃인 고대 일본의 성씨제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골품제 관련 유적지
- 경주 동궁과 월지: 성골의 궁궐이 있던 곳입니다.
- 김해 금관총: 진골의 무덤입니다.
- 경주 천마총: 성골의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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